[어느 공학자의 통신 칼럼 ①] 광섬유통신의 시대...광통신연구실 조직부터 현장시험까지
[어느 공학자의 통신 칼럼 ①] 광섬유통신의 시대...광통신연구실 조직부터 현장시험까지
  • 데일리e뉴스 webmaster@dailyenews.co.kr
  • 승인 2023.06.20 14: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마트폰이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없어선 안 된 물건이라는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네트워크와 통신 기술을 바탕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은 물론 인터넷을 이용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IT강국이라는 별칭답게 통신 산업에 대한 관심과 정부, 기업 측의 노력이 이어져왔다.

데일리e뉴스는 한국 통신 기술의 흐름을 짚어보고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통신 산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찰해본다. <편집자 주>

강민호 인물 소개. (그래픽=데일리e뉴스)

한때 초연결망을 대표하는 단어는 '광케이블(광섬유통신)'이었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구리줄(동선) 대신 유리줄(광섬유)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대용량, 고품질, 디지털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광섬유통신 시대였다. 전 세계적으로 실용화 경쟁에 불이 붙었고 우리나라도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필자가 1978년 9월에 KTRI(한국통신기술연구소)의 1호 정부유치과학자로 귀국해서 작명한 광통신연구실은 국내 광통신 개발의 구심체가 되었다.

당시 KIST에서 독립한 KTRI는 소장(정만영) 산하에 교환기술(안병성), 광통신을 포함한 전송기술(김종련), 계통기술(경상현)의 3개 부소장이 있었다. 조직은 갖춰졌지만 정작 필요한 장비 등이 준비되지 않았다. 다행히 귀국 전 벨연구소에서 준비해둔 광학 테이블, 분광기, 록인 증폭기, 테크트로닉스 오실로스코프, 비트 에러율 검사기, 광감쇠기, 광증폭기 등을 바로 발주할 수 있었다.

9월 25일의 첫 실 회의에서는 최단시일에 광섬유통신을 시현하기 위해 김장복이 Pin FET 광수신기, 정신일이 6.3 Mbps LED 광송신기, 이상호가 광 송·수신기-광섬유 결합 시험과 62.5 μm 광섬유 커넥터 설계, 그리고 공비호가 전원과 케이스 설계를 맡았다. 

10월 20일에는 광섬유 전화 통화 시범을 위해 PCM 단국장치와 광통신 방식을 연동하는시나리오를 작성했다. 12월 20일까지 시범하기 위하여 시설의 선정, 설치 PERT를 작성하고 예산과 인력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열흘 후인 30일에는 체신부의 이상범 과장과 1979년의 현장시험 원칙을 협의하고 이희두, 이영희 과장과 국간 거리가 2.2km인 광화문-중앙전화국을 국내 최초의 현장시험 장소로 정했다.

이즈음에 연구소 기획실의 최문기가 1979년 초의 박정희 대통령의 체신부 초도 순시 시에 광통신 전화를 시범할 것이니 차질없이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연말에는 중용량 광전송 장치개발 보고서(강민호, 김장복, 정신일, 이상호)를 제출했다.

1978년부터 1981년 주요 사건 개요. (그래픽=데일리e뉴스)

1979년 초부터는 국내 최초의 광섬유를 통한 전화 데모 준비로 바빴다. 연구실원 네명은 실험실에서 가슴 졸이면서 밤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후 2월 중순, 대통령 연두순시 전날에 데모 장치가 고장나 난감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국내 최초로 광섬유 한 가닥에 96채널 전화 통화를 무사히 시연했다.

KTRI는 최초의 현장시험을 위하여 1979년 초부터 통신구 현장 파악, 광섬유 융착 접속기와 광 송·수신기를 자체 개발하고 대한전선과 금성전선은 Valtec사의 광섬유를 사용해서 4심선의 광케이블로 만들어서 체신부 현장 요원들이 서울 중앙전화국과 광화문 전화국 간의 2.2km 관로에 포설했다.

자체 개발한 레이저다이오드 광송신기와 PIN 다이오드 광수신기를 사용하여 9월부터 국간 중계 시험을 시작했는데 여기서는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광섬유 한 가닥으로 672 회선의 음성 전화 신호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다. 

단말장치의 광송신기의 출력은 1mW이고 광수신기는 10nw까지 감쇄된 신호로도 비트신호 오율이 매우 낮은 품질이 보장된다. 연구소에서 자체 개발한 광섬유 융착 접속기도 현장의 케이블 접속에 사용했다.

광섬유의 전송 손실은 약 5dB/km이다. 이 시스템은 1979년 말까지의 약 1200시간 연속 동작에서 양질의 국간 중계용 음성신호를 전송하고 있었다. 이 실용시험을 통하여 광섬유 통신시스템 국산화에 자신감을 얻었다. 

1979년의 광화문-중앙전화국간 현장시험 성공으로 1980년 벽두부터 한국의 광섬유 PCM 반송 시스템의 국산화 개발계획을 세웠다. 이어 1981년에 국간 중계 시스템을 완전 국산화하여 구로-시흥-안양 국간 상용 시범을 체신부에 건의했다. 

여기에는 KTRI의 44.7 Mbps 실용화시험 요약, KIST의 광섬유 제조연구, 극제전화전신(ITT)과 비교한 국산 시스템의 경제성 검토, 광송·수신기 4조, 중계기 및 경보 유닛 2조, 광섬유케이블 20-40km, 손실, 대역폭, OTDR 측정장치, M13 다중화 장치, D-4 PCM 채널 뱅크, 정합중계장치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광섬유통신 시스템의 국산화 개발 일정계획을 포함시켰다. 

1980년대가 되면서 연구실에서 광통신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월 21일부터 3월 11일까지 진행된 CCITT(국제전기통신엽합 산하의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 광통신 전문가 회의에서 한국이 개발한 시스템에 관한 권고안을 발표하고 선진국들의 첨단 연구개발 동향을 파악했다.

이듬해인 1981년 12월, 44.7 Mbps 구로-시흥-안양 전화국 국간중계 실용시험은 최대 중계기 간격을 12km로 정하고 광케이블의 여러 특성은 CCITT의 규격에 맞추어 맞추었고 자체 개발한 케이블의 접속 및 고장위치 측정방법(OTDR)을 현장에 적용했다. 완전 국산화된 시스템과 광케이블 업체들과 수시로 협조해 설계 목표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후 전화국 간의 현장시험 시스템의 성능보강을 계속해 1982년 8월에는 상용 중계선을 384회선으로 늘렸다. 이와함께 장거리 대용량 전송 시 기존 시스템보다 훨씬 경제적인 1.3 μm, 90 Mbps시스템의 개발 타당성과 예비설계를 완료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만리재로 14 르네상스타워 1506호
  • 대표전화 : 02-586-8600
  • 팩스 : 02-582-8200
  • 편집국 : 02-586-8600
  • 광고마케팅국 : 02-586-860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남현
  • 법인명 : (주)데일리경제뉴스
  • 제호 : 데일리e뉴스
  • 등록번호 : 서울 아 05140
  • 등록일 : 2018-04-25
  • 발행일 : 2018-05-01
  • 대표이사/발행인 : 김병호
  • 편집인 : 정수성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 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김병호 02--586-8600 dailyenews@naver.com
  • 데일리e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데일리e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enews@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