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WHO, 자성의 목소리 필요할 때
[기자수첩] WHO, 자성의 목소리 필요할 때
  • 천선우 기자 bluecat@dailyenews.co.kr
  • 승인 2020.04.0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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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우 경제산업부 기자
천선우 경제산업부 기자

[데일리e뉴스= 천선우 기자] 최근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질병으로 분류했던 '게임'을 활용하겠다고 선언한 것.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위해 게임 이용을 적극 권장한 것이다.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한 지 불과 반년 만이다. 앞서 게임을 마약, 알코올 중독과 동급으로 볼 때는 언제고 이제와 손을 내미는 모양새가 우습다. 아울러 국제기구임에도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쉽게 번복하는 행태를 보자니 공신력에도 의구심이 생긴다.

WHO가 급작스레 태세 전환한 이유는 간단하다. 게임은 홈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통신업체 버라이즌의 통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공표한 17일을 기점으로 미국 내의 온라인 게임 이용률은 전주 대비로 75%나 상승했다. 반면 활발할 것으로 예상됐던 스트리밍 등 영상 서비스는 같은 기간 12% 상승에 그쳤다.

이는 일상의 단면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PC방이 많지 않다. 콘솔, 온라인 등의 게임을 집에서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제한적인 만큼, 사실상 게임이 효과적인 자가 격리 수단으로 작용한 셈이다. 특히 게임은 실시간 서비스에서도 강점이 있어, 외출 자제 등 오프라인 만남이 어려운 현 상황에서 사회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체재다. WHO의 논리대로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코로나19)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질병(게임)이 대항마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WHO는 고민이 컸을 법도 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글로벌 확산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까닭에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단을 찾기 위해 골몰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찾았던 유일한 해결책이 게임이란 사실을 알고 낙담했을 수도 있다. 게임을 선택하는 것이 자칫 입장을 번복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 공신력에 흠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입장과 해명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WHO가 앞서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할 때 반발이 컸다. 게임 중독으로 인한 증상에 대해 명확한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성급해 보였다. 앞서 WHO는 2018년까지는 신체적 건강과 관련된 질병 등을 규제하고 정의해왔다. 정신적 질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지난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왕 게임을 캠페인으로 활용하기로 했다면 질병 분류에서 철회를 하든, 재심사를 선언하든 해결되지 않은 의혹들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질병 유발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게임 업계와 수많은 게이머들에게도 사과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WHO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번 캠페인에서 게임을 선택한 이유로 WHO가 곁들인 설명은 참으로 가관이다. 게임이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에 격리된 사람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듣기엔 참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5월 게임을 최초 질병으로 정의할 때 내세운 근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 WHO는 게임 이용 장애를 정식 질병코드로 등록하면서 중독성 행위 장애로 분류했다. 게임을 마약, 알코올, 도박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이다. 마약, 알콜 등은 공통적으로 정신적 의존증이 나타난다. 중독 자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다. 중독으로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논리를 내세울 거면 게임이 아닌 마약을 써도 무방하다는 뜻인가. 

앞서 언급했듯 게임이 질병 코드로 분류됐을 때 WHO는 정신적 중독에 관한 명확한 의학적 입증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다수결에 의한 만장일치란 결과가 게임이 중독에 가깝다는 타당성을 입증하는 근거라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공신력은 근거와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특히나 국제기구라면 이러한 검증은 더더욱 중요하다. 과거 WHO는 비슷한 과오를 범한 적이 있었다. 1973년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정의한 것이다. WHO는 41년이 지난 뒤에서야 성명을 통해 트랜스젠더와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게임 시장이라고 다를 텐가. 산업이 전부 사장된 이후에야 규정을 바로잡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WHO에는 각국 보건복지부 장관들이 모인다. 이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와 결정이 세상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오류는 더 큰 인식의 전염병을 가져올 뿐이다. 현재 게임 산업은 질병이라는 사회적 인식 속에 유례 없는 악재를 겪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으로 평가받던 게임들이 신종 전염병을 막는 수단으로도 쓰이고 있다. WHO의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게임이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점이 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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