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아이템 자율규제 공개 의무화, 그게 최선일까
[기자수첩] 아이템 자율규제 공개 의무화, 그게 최선일까
  • 천선우 기자 bluecat@dailyenews.co.kr
  • 승인 2020.02.12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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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우 경제산업부 기자
천선우 경제산업부 기자

"게임 접습니다. 모두 안녕히 계세요."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유저 인증글이 올라왔다. 무려 5000만원의 거금을 결제하고도 게임을 그만둔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저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접는다며 스스로 운이 없다고 자책했다. 그간 정부가 게임사에 위임했던 아이템 자율규제 제도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이에 정부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었다. 대상은 사행성 조장 의혹을 받고 있는 게임업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말 아이템 자율규제 공개를 의무화할 것을 천명하면서 게임 시장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하지만 정책 실효성에 대해선 의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확률만 표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게임사의 지나친 과금 유도에 있다. 숲이 멀쩡한지 확인하려면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들여다봐야 한다. 국내 게임업계는 이른바 '가챠(확률형 뽑기 콘텐츠)'로 불리는 과금 구조를 국민 룰처럼 사용해 왔다. 유저들의 경쟁 심리를 건드리는 데는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확률은 낮지만, 단시간에 가장 빠르게 멀리 앞서나갈 수 있다. '판도라 상자'에 선뜻 손이 가는 이유다. 문제는 이 좁은 바늘구멍에 유저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엑소스 히어로즈의 확률표를 보면 상위 영웅을 소환하는 확률은 0.2%에 불과하다. 돈을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한 확률이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게임사는 가챠 콘텐츠를 보조적인 수단이 아닌 필수 콘텐츠로 교묘하게 둔갑시키고 있다. 이벤트를 뜯어보면 거의 '뽑기' 콘텐츠에 맞춰져 있다. 확률을 향상하는 것부터 시작해 마일리지 제도, 캐시백 등도 실상은 확률이 조금 더 올라간 새로운 가챠일 뿐이다. 허들을 낮춰났으니 더 많은 돈을 쓰라는 셈이다.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문제다. 게임사는 과금이 아닌 경우,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묶어 유저들의 인내심을 바닥에 이르게 만든다. 역할수행게임(RPG) 장르를 보면 아이템 획득부터 실제 소유하기까지의 과정이 꽤나 까다롭다. 달빛조각사 같은 경우는 낮은 확률로 습득할 수 있는 아이템을 '상자' 형식으로 바꿔 바로 습득할 수 없도록 1차 저지선을 세웠다. 2차로는 이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현해 장벽을 한층 높였다. 이마저도 과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구조적으로 막은 것이다.

세계 곳곳에선 확률형 아이템을 '도박'으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서고 있다. 무작위로 습득하는 방식이 도박의 특성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영국 의회에서는 '환금성'을 이유로 확률형 아이템을 미성년자에게는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이템 거래 및 현금화가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 실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임업계가 변명처럼 일관한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확률표 공개를 시장에 맡겼더니, 일부만 공개하고 일부는 감추는 꼼수를 부렸다. 아울러 게임 산업발전을 위해 규제를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 역시 얼토당토않다. 확률형 아이템은 근 10년간 게임업계에 있어 가장 수익성 좋은 모델로 뿌리내렸다. 유저들이 불만을 표출할 때 업계는 오로지 '돈의 논리'로 맞받아친다. 이해타산을 앞세워 혁신적인 과금 모델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게임 산업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 국가의 게임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 중인 데도 말이다. '무엇이 중한지'는 정부의 선택에 달렸다. 근본적인 과금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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